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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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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TI 2023. 6. 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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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렌체

정치적으로 최고 수준의 자각과 가장 다양한 인간의 발전

- 부르크하르트 -

 

  당시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국가들 중 피렌체야말로 르네상스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14세기 피렌체의 상인 빌라니(G. Villani)가 쓴 <피렌체 연대기>에는 당시 피렌체의 인적 자원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되어있다. 1300년대 피렌체는 인구 약 9만명에 글을 배우는 아동이 8,000에서 1만명, 산수를 배우는 아이는 1,000에서 1,500명, 교회가 110개였다. 병원은 30개로 1,000 이상의 병상을 갖고 있으며, 의사는 60명, 약제사가 100명이었다. 200여의 모직물업자가 매년  8만필의 모직물을 생산하고, 은행이 80개, 변호사가 600명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숫자에는 과장이나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대인에 의해 이러한 통계가 작성되었다는 사실 체가 이탈리아 이외의 도시에서는   없는 일이다. 

  피렌체는 이미 12세기에 모직물 제조와 판매로 크게 성장하였다. 13세기에는 대상인과 금융업자를 중심으로 하는 상층부르주아지가 시 행정 및 정치에서 봉건귀족 세력을 밀어내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1289년에는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봉건귀족에 의한 농노제는 폐지되었지만 내부적으로 사회계층간의 격차와 대립은 심해졌다. 시정을 독점한 상층시민,  대시민(popolo grasso)  소시민(popolo minuto),  장인이 직인  소생산자층의 저항이 발생하여 14세기 중엽에는 이들 또한 시정에 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민주적인 발전은 1378 치옴피(Ciompi, 모직공) 난으로 더욱 촉진되었다. 당시 모직공 사실상 임금노동자인 하층시민이었다. 그러나 치옴피의 난 이후 조합을 만들 권리와 또한 조합을 통해 시정에 참여할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거듭되는 사회계층간의 대립은 대부분의 시민에게 안감을 주었다.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유지해줄 강력한 지배자가 희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금융가였던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Cosimo de Medici)가 15세기에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의 손자 로렌초(Lorenzo the Magnificent) 집권기 내내(1469~1492) 공화정을 유지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전제군주로서 군림하였다. 그가 죽은  사보나롤라(Savonarola, 1452~1498) 반르네상스적인 종교개혁운동이 벌어졌다.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가 돌아왔으나, 이미 피렌체의 영광과 번영은 사라지고 없었다.

 

# 베네치아

  피렌체와 달리 베네치아는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였다. 중세 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던 베네치아는 15세기 들어서 (Po) 하류계곡 지대, 아드리아해 달마티아연안, 그리스 본토와  주변  일부를유하는 제국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상업거래 총액은 4,000 두카텐(ducaten : 3.5~3.6g 금을 함유한 금화) 달하고 작은 배는 약 3,000척에 선원 17,000명, 큰 배는 약 300척에 선원 8,000명을 보유했다. 여기에  개의 마스트(돛대. 돛을 달기 위해 선체 갑판에 수직으로 세운 기둥)를 가진 갈레선 45척에 선원 11,000명을 보유했다. 돛과 노를 병용했던 갈레선은 점차 범선화하여 좀 더 먼거리를 오랫동안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보통 1척에 선원 200명 이상, 화물 250톤 정도를 적재하였다. 베네치아는 갈레선 여러 척으로 선단을 구성하여 운용하였다. 매년 정기적으로 4척이 플랑드르와 레바논 연안, 3척이 흑해, 알렉산드리아, 2척이 남부 프랑스 등지를 왕래하였다. 한편 2~3척은 순례자를 태우고 성지로 향했다.

  선박 관련 제조업도 크게 번성하여 선박 관련 수는16,000명이었고, 조선소에는 보통 1,000 이상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정치적으로는 과두제적인 공화국이었다. 처음에는 시민회의에서 종신제 총독(도제, doge) 선출하였다. 그러나 실권은 점차 전시민의 2% 정도밖에 되지 않는 대상인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도시귀족화한 대상인 신으로 구성되는 대회의에서 총독을 선출했고, 시정 실무를 담당할 소위원회들 선출하였으나, 가장 핵심적이었던 것은 '10인위원회'였다. 총독은 점차 실권을 상실하고 형식적 존재가 되었다. 베네치아에서는 러한 과두제적인 공화제가 큰 문제없이 평화롭게 유지되고, 주변 여러 나라들에 외교사절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무역과 상업에 뛰어났던 베네치아는 피렌체와는 달리 고전이나 문예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 밀라노

  밀라노는 피렌체나 베네치아보다  전형적으로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크고 작은 공국들의 정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곳이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곡창 롬바르디아 평야의 중심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또한 알프스 이북 지역을 왕래하는 무역로의 종점이기도 했다. 일찍이 직물업과 금속공업이 발달하였으며, 12세기에는 룸바르디아동맹을 거느리고 황제 프리드리히 2세 대항할 정도로 강력하였다. 당시 밀라노는 약간의 재산을 가진 모든 시민 참가하는 시민회의(Parlarento) 귀족이 지배하는화국이었다. 그러나 비능률적인 시정과 시민층 내부에 당쟁과 대립이 계속되었다. 13세기 후반  귀족가문인 비스콘티(Visconti)가문이 정권을 장악하고 전제정치를 실시하였다.

  1447비스콘티 가문의 직계가 단절되자 용병대장(콘도티에레 : condottiere)이자 마지막 스콘티가문 서출 여자의 남편이었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 1401~1466) 정권을 장악하였다. 스포르차는 그의 차남으로서 조카의 정권을 찬탈한 루도비코  모로(Ludovico II Moro, 1451~1508) 함께 15세기 전제군주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재능과 냉정한 타산을 믿, 정권의 장악과 유지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편 학자나 문인들 주변에 모으고 문예의 보호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비스콘티 가문의 쟝갈레아초(Giangaleazzo, 1351~1402) 무자비하게 거두어들인 막대한 세금으로 통일된 탈리아의 왕좌를 꿈꾸는 한편, 웅대하고 장엄한 밀라노대성당과 화려한 파비아 전을 축조하고, 여기에 그가 수집한 서적의 문서고 마련하였다. 한편 루도비코  모로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정을 꾸미는 동시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예술가와 학자를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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