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지금도 회자되는 만능의 천재였다. 회화와 조각에 뛰어났으며 그의 인체 해부도는 정확할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이며 인체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이기도 했다. 물리학과 토목기술에도 뛰어났으며, 새로운 기계를 설계하고 구상하였다. 다 빈치는 남다른 예술적 영감과 지성으로 여러 구상을 떠올렸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것이 많았다. 당시의 기술로는 그의 사상이나 상상에 떠오르는 대상을 온전히 실현해내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원근법과 명암법을 절묘하게 사용하였다. "모나리자"(Mona Lisa)로 알려진 <라 지오콘다>(La Gioconda), <최후의 만찬>(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다 빈치는 피렌체 출신이었으나 밀라노의 루드비코 일 모로, 그리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도 봉사한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이었다.
미켈란젤로 또한 르네상스기 위대한 예술가이자 만능의 천재였다. 그는 화가인 동시에 조각가, 건축가였으며, 플라톤학회 회원으로 활동한 시인이기도 했다. <피에타>, <다비드> 등의 조각작품과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등의 걸작을 남겼다.
라파엘로는 성모상(Madonna) 그림이나 <아테네 학당> 등의 작품에서 밝고 안정적인 조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고민과 고뇌로 가득했던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의 생애도 실망이나 좌절을 모르는 행복한 것이었다. 16세기 들어 예술의 중심이 피렌체에서 로마로 이동하자,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513)와 레오 10세(1513~1521)의 부름을 받아 풍요로운 환경에서 명예를 누리며 작업하였다.
고대의 유물이 많이 남아있던 조각 분야에서는 고대의 작품들을 모범으로 삼았다. 또한 회화와 마찬가지로 인체와 사물에 대한 정확한 관찰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표현이 이루어졌다. 피렌체 출신 기베르티(1378~1455), 브루넬레스키(1377~1446), 도나텔로(1386~1466) 등이 유명하다. 피렌체 세례당 문에 양각된 기베르티의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찬탄하였다. 조각과 별개로 기베르티는 그의 자서전 <코멘타리>에서 당시 미술 기법과 동향, 자신의 견해들을 남겨 르네상스 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르네상스기 예술 각 분야의 대표를 꼽을 때 마사치오의 회화, 브루넬레스키의 건축과 더불어 조각에서는 도나텔로가 창시자이자 대표라고 할 수 있다. 26세에 완성한 <다비드상>은 5미터가 넘는 크기에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르네상스 이전 이탈리아에서는 알프스 이북과 달리 고딕양식 건축이 활발하지 않았다. 로마와 피렌체, 밀라노 등에서 돔과 아치형식, 그리스 열주식 등을 조화시킨 르네상스 양식이 발전하였다. 브루넬레스키는 일찍이 도나텔로와 조각 분야에서 경쟁하였으나 피렌체 세례당 입찰 경쟁에서 물러난 뒤 건축에 집중하였다. 이때 설계한 것이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과 거대한 팔각 돔(cupola)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뒤늦게 고딕 양식이 유행하려던 분위기였으나 '브루넬레스키의 돔'으로 인해 고딕은 다시 밀려나고 소위 르네상스식 건축이 대세로 자리잡게 되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또한 르네상스기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브라만테(1444~1514)가 설계 및 착수한 것을 미켈란젤로가 완수하였다. 그밖에 군주들의 궁전, 도시의 공공건물, 부유한 개인 저택 등에서도 새로운 르네상스 양식이 유행하였다.
16세기 들어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은 서서히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이 시기 상업의 도시 베네치아는 지오르지오네(1478~1511), 티치아노(1477~1576), 틴토레토(1518~1582), 베로네제(1528~1588) 등 베네치아파 화가들이 등장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황혼을 장식하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호화롭고 찬란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만 해도 아직 일말의 수줍음을 보이지만,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매혹적인 관능미가 넘치고 있다.
16세기 중반 이탈리아 전역이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521년부터 1544년까지 23년에 걸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신성로마는 프랑스에 가로막힌 에스파냐와의 연결을 위해 이탈리아가 필요했다. 프랑스는 샤를마뉴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이탈리아를 차지하고 싶어했다. 전쟁 초기인 1527년 카를 5세가 벌인 "로마의 약탈"로 수많은 작품들이 파괴되었고, 보통 이때를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결정적으로 쇠퇴한 시점으로 보고 있다.
이후 16세기 후반이 되면 찬란하고 창조적이었던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미술은 그 생명력을 상실하여 거장들의 작품을 모방하고 외형을 과장하고 기교에 치우친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매너리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이후 이탈리아 미술은 17세기에 바로크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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