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를 통해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가 "부활"했다고 하지만 그것들이 중세에 완전히 자취를 감췄던 것은 아니었다. 민족대이동으로 인해 그리스어 지식과 작품들 대부분은 잊혀져버렸으나, 라틴어는 여전히 유효했다. 비록 키케로 시대에 비하면 속화되었지만 교회용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수도원, 성당학교 등의 교육, 저술, 필사작업 등을 통해 학문적 명맥을 이어나갔다.
11세기 이후에는 십자군전쟁과 이슬람 세계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소개되어 스콜라철학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문화계를 지배하던 중세 내내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은 대체로 미미하였고, 적극적으로 계승·발전시키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고대문화의 유산들은 중세교회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 필요한 범위에 한해 수용·전수되었을 뿐이었다.
봉건사회가 동요하고 교황권이 쇠퇴하자 교회도 생활과 문화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그러자 일찌감치 자유로운 시민사회·도시국가가 형성된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적이고 일률적이며 경직된 중세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와 가치를 찾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고대문화는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것으로 보였다. 이들은 중세교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고대문화를 보게 되었다. 고대문화에 도취되었고, 전체적이고 참된 모습을 알고 싶어했다. 이로써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가 부흥하게 되었고, 새로운 르네상스기의 문화가 창조되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인문주의자(Humanist)는 르네상스기 고대문화의 부활에 앞장선 사람들이었다. 문인이자 학자였으며 새로운 관심과 시각을 갖고 고대작가의 작품을 수집·정리하고 연구하였다. 인문주의(Humanism)은 이러한 학문적 기풍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문주의라는 말은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키케로에 의하면 후마니타스란 인간성을 다듬어주는 품위있는 글과 예술의 힘을 뜻하였다.
이러한 힘을 가진 것으로서 시, 수사학, 역사, 윤리 등 소위 인문적인 교양과목이 강조되었다. 이들 교과목은 중세 수도원학교나 대학에서도 기초과목으로 인정되었다. 연구 및 교육의 기초자료는 그리스·로마의 고전작품이었다. 그러나 결국 중세에는 교회와 그리스도교 교리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 자체로 존중되고 연구되지 않았다.
르네상스기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작품을 수집·정리·연구할 때 이러한 제약에서 벗어나 있었다. 또한 고전작품을 중세의 작품보다 더 자유롭고 폭넓고 합리적이며,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인생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환영하였다. 이들에게 고전작품은 인간의 정서에 씌워진 속박과 미적 감각에 대한 구속, 그리고 모든 지적 활동에 대한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구로 여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르네상스는 단순히 먼 과거를 아름답게 회상하거나 모방하는 복고적 수준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문화창조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페트라르카(Petrarca. 1304~1374)는 고대 작품 수집 및 연구활동을 의식적으로 추진한 최초의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학생 시절에 이미 키케로 시대에 매혹되어 이탈리아의 역사와 고대세계, 문화에 동경을 품고 있었다. 그는 라틴 작가의 작품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에 열중하게 되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를 주이공으로 한 라틴어 서사시 <아프리카>는 그의 연구결과물 중 하나였다.
<칸초니에레>(Canzoniere)는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빛나는 서정시집이다. 젊었을 때 만난 라우라(Laura)라는 여인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작품들인데,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인간과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최초의 근대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미 나는 마음으로 느꼈네
이미 나는 마음으로 느꼈네
그대에게서 생명을 얻었던 정신이 스러지고 있음을.
지상의 동물이라면 당연히
죽음에 맞서야 하나니,
난 열정을 펼쳐 자제하며,
거의 잃을 뻔한 길 위에 내려놓았네.
열정은 밤낮으로 나를 그 실로 초대하지만,
나는 다른 곳으로 가려 하네.
수줍음 많고 게으른 나를 이끌어
그 아름다운 눈길을 다시 보게 하지만,
그대에게 부담 줄까 내 모습만 바라보네.
이제 나는 조금 더 살리라.
나의 삶에 단 한번의 그대 눈길이
그토록 힘이 되기에.
내가 열정을 믿지 않게 될 때,
그때 죽으리.
- <칸초니에레>, 2004, 페트라르카 저, 김효신 등 옮기 -
한편 보카치오(Boccaccio. 1313~1375)는 페트라르카의 제자이면서 뛰어난 연구자이기도 했다. 이들은 1350년 밀라노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갔다. 보카치오가 페트라르카에게 신앙적인 위로를 구하였을 때 맹신(盲信)에 흐르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또한 보카치오가 수도사 차니의 위협으로 자신의 모든 산문작품을 태워버리려 했을 때 페트라르카가 현명한 충고로 이를 막았다.
페트라르카 자신은 그러지 못했지만 보카치오에게는 그리스어를 배울 것을 권하였다.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 그리스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소수의 뛰어난 그리스 출신 학자들에 힘입은 바 크지만, 이탈리아인으로서 고대 그리스 문화에 관심을 갖고 주목할만한 성과를 낸 것은 보카치오가 처음이었다.
또한 보카치오는 <데카메론>(Decameron)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데카메론>에는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 교외의 오두막에 모인 남녀 10명이 10일 동안 번갈아가며 짤막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구성이다. 이들은 모두 나름의 개성을 드러내며 다양한 이야기를 내놓는다. 예를 들어 가장 젊은 여성인 네이피레는 천진난만한 이야기를 하고, 팜피로와 디오네오는 대담한 이야기를 한다. 여기에는 당시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교회, 수도사의 위선에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가 담겨있다.
<데카메론>은 단테의 <신곡>과 대비되어 "인곡"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신곡>이 적극적으로 중세 사회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과 달리 보카치오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비판하지만 재치와 풍자를 가미하여 영국의 초오서 등 동시대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 근대소설의 효시로 여겨지기도 한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가 세상을 떠난 1470년대 이후 인문주의 연구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페트라르카 시대에도 여전히 빈약했던 그리스 관련 연구들도 활발해졌다. 비잔틴 출신 크리솔로라스(Manuel Chrysoloras)가 피렌체, 밀라노 등 이탈리아에서 진행한 그리스 관련 강의들이 이탈리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서 <그리스어 문법>은 서유럽에서 간행한 최초의 그리스어 교과서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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