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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대학과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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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TI 2023. 5. 23.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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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의 접촉

  봉건사회의 전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유럽은 11세기 이후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에서의 "재정복"과 십자군을 통해 유럽인들의 시야가 넓어졌으며, 당시 선진문화였던 이슬람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9세기 말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신플라톤 학파의 일부 저작도 번역되어 있었다. 아랍 및 유대인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슬람교나 유대교와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들 대부분은 에스파냐 톨레도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12세기 후반에 아랍학자들의 주석과 함께 유럽에 소개되었다. 로마 멸망 후 유럽에 알려져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보에티우스가 번역한 논리학에 관한 초보적인 논문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슬람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전부 소개되면서 유럽 중세학문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중세 유럽의 학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체계를 어떻게 그리스도교 교리의 테두리 속에서 융화시키느냐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학문과 교육의 변화

  11세기 이후의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은 중세학문과 문화발달에 또다른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고,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게 되었다. 중세 전반기 수도원과 수도사는 학문과 교육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12세기 들어 수도원은 활발한 수도원 개혁운동에도 불구하고 문화 면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상실하였다. 학문과 문화의 주도권은 수도사가 아닌 일반 성직자로, 수도원이 아닌 주교성당의 부속학교(schola)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로마제국 말기부터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고 가르치는 개인교사가 있었다. 알프스 이북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지급해주는 주교성당이나 부유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결과 많은 주교도시가 학문과 교육의 중심이 되었고, 학생들이 그 곳에 모여들기도 했다.
  그러나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에 걸쳐 유럽 각지에 대학이 설립되었다. 대학은 수도원, 성당 부속학교 등을 대신하여 학문 연구와 보급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중세의 대학

  중세 유럽의 대학은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에 걸쳐 학생조합, 교사조합(길드)에서 출발하였다.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는 본래 집단적인 의미로의 '전체'라는 뜻이며, 공통된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에 적용되었고, 실제로 수공업자 조합 회원들에게도 사용되었다. 즉 대학의 기원은 기본적으로 교육을 위한 길드인 것이다. 이탈리아와 남유럽에서는 학생길드, 알프스 이북에서는 교사길드가 중심이 되었다. 학생길드, 교사길드는 국왕이나 군주의 허가 없이도 결성될 수 있었다. 다만 당시의 작가들이 흥미롭게 생각한 사건은 아니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의 설립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대학의 설립: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은 12세기 초 이레니우스의 로마법 강의, 12세기 중엽의 그라티아누스의 교회법 강의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12세기 말 법학 연구로 명성이 널리 퍼져 학생들이 모이게 되었다. 학생들은 이탈리아 출신 길드, 그 외 국가 출신 길드 등 두 개의 학생길드(nation)를 조직하여 대학운영과 학생생활을 관리하였다.
  파리대학은 노트르담 성당학교의 명성에 이끌려 모인 교사들이 12세기 말 길드를 형성하면서 설립되었다. 이후 교황도 파리 대학에 신학 관련 자문을 구할 정도로 중세 신학 연구의 총본산이 되었다. 1200년, 필립 2세는 교사와 학생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특허장을 교부하였다. 
  옥스퍼드는 12세기 전반 파리, 볼로냐 출신 교사들이 강의를 개설하면서 시작되었다. 1167년 영프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헨리 2세가 파리 소재 영국 학자들에게 귀국명령을 내리면서 대학의 기틀이 잡혔다. 캠브리지 대학은 옥스퍼드, 파리에서 이주해온 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으나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유럽 내 다른 지역에도 13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많은 대학이 설립되었다. 13세기에는 에스파냐, 포르투갈, 14세기에는 독일에도 대학이 설립되었다. 

 

대학의 자치권 투쟁

  모든 대학은 세속군주나 도시당국, 교회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 투쟁하였다. 그 결과 대학은 자치권을 얻을 수 있었다. 옥스퍼드의 경우 교사와 학생, 시종들에 대한 사법권을 총장이 행사하게 되었고, 파리 대학은 여기에 더하여 대학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길드에 대한 감독권을 얻었다. 그리고 오랜 동안 교회가 행사했던 교사자격증 수여권도 획득하였다.

 

대학의 교과과정

  대학의 기본 교과과정은 3교과(문법, 수사, 논리)에 4교과(수학, 기하, 천문, 음악)를 더한 "7개 자유교과"였다. 3교과를 수료하면 문학사(bachelor of arts) 학위가 주어졌다. 이는 수공업자 조합에서 직인(journeyman)에 해당하였고, 초보적인 교과를 가르칠 수 있었다. 그 후 5~6년 수업을 거치면 완전히 독립된 교사 자격인 문학석사(master of arts)가 될 수 있었다. 문학석사 보유자는 7개 자유교과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거나 전문학부로 진학하여 법률, 의학, 신학을 공부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전문과정을 이수하면 박사학위가 수여되었다. 그 중 신학이 가장 길고 어려웠다. 문학석사는 4년 수업을 이수해야 신학사가 되고, 이후 6년을 더 수학해야 신학박사가 될 수 있었다. 때문에 학생 다수는 돈벌이가 잘 되는 법학과 의학을 선택하였다.

 

칼리지

  칼리지(college, 단과대학)는 대학의 구조, 구성에서 중요한 발전이었다. 그 기원은 대학 외부 인사들이 가난한 학생을 위해 설립한 기숙사였다. 이 기숙사에서는 무료 혹은 아주 저렴하게 숙식을 제공하였고, 교사가 상주하면서 학생들의 공부를 지도하기도 했다. 최초의 칼리지 중 하나인 소르본 대학은 1258년 파리의 부유한 상인 로베르 드 소르본이 설립하였다. 영국에서는 로체스터 주교 월터가 옥스퍼드에 설립한 머튼 칼리지, 영국 북부의 대제후 존 벨리올이 설립한 벨리올 칼리지가 가장 오래되었다. 칼리지는 설립자에게 광대한 토지 및 지대의 기증을 받았다. 그 반작용으로 중세 말 종합대학의 강의는 점차 중요성을 상실하였고, 단과대학이 대학교육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중세의 대학생

  중세에는 학생 신분을 얻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학생은 일단 승적(성직자 명단)에 기재되었고, 성직자처럼 삭발하였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의 언행이 경건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학생은 청춘을 즐기며 '술과 노래와 여자'에 취하기도 했고, 시민들과 유혈사태를 빚기도 했다. 15세기 파리에서는 가장 악명높은 범죄인의 소굴이 대학 바로 뒤에 있었는데, 그 곳 주민의 상당수가 대학생을 가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중세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저명한 학자 대부분이 대학에 속해있었고, 각 학부는 해당 분야의 최고권위로 인정되었다. 어느 교황은 종교문제를 결정하면서 파리대학 신학부에 상의하지 않은 것을 사과한 일도 있었다. 대학졸업생은 학식을 필요로 하는 전문직군을 메꾸었다. 문학석사는 교사, 학교장, 행정가가 되었고, 법학박사는 법률가나 군주의 관리가 되었다. 교회법학자는 교회법정의 법관이 되었고, 신학박사는 신학교수나 고위성직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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