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언어생활은 라틴어와 속어가 함께 사용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라틴어는 교회, 학문, 법률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보편적인 언어로서 중세문화가 통일성을 보이는 데에 공헌하였다. 한편 속어(vernacular)는 가정, 시장, 작업장 등에서 사용되는 일상적인 언어였다. 속어는 이후에 "국어"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의 이중구조에 따라 중세시대의 문학 또한 라틴어문학과 속어문학으로 나누어졌다. 다만, 라틴어문학은 학생이나 방랑시인들이 술과 사랑에 대해 부른 노래 외에 별다른 작품이 없다. 소위 골리아드파(Goliards)는 지식을 찾아 다른 대학으로 이동하는 학생 혹은 세속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하급성직자들이었다. 도덕과 금욕주의를 풍자하고 환락적인 남녀의 사랑을 노래했다. 이들은 종교음악도 풍자하고 조롱하는 내용으로 개작하기도 했다. 영국, 프랑스보다는 독일에서 좀 더 활발히 활동했다.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 카르멘은 '노래, 시', 부라나는 '세속'이라는 의미)는 13세기(1230년경) 바이에른 지방 베네딕트 계통 수도사들이 필사한 대표적인 골리아드 시가집이다. 흥미로운 점은 수도사들이 직접 외설스럽고 불경한 곡을 필사하였고, 수도원 도서목록에도 포함되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파기되지 않고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중세문학의 주류는 속어문학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게르만족의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정신을 표현한 영웅서사시와 봉건사회 기사도와 사랑을 다루는 기사문학이 대표적이다. <베오울프>는 8세기경 잉글랜드에서 나타났으며 최초의 기사문학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니벨룽겐의 노래>는 13세기경 완성되었으나 그 내용은 중세 초기 게르만의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노르만(바이킹)의 모험과 사랑, 복수 중심의 장르를 '사가'(saga)라고 한다.
12세기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는 트루바두르라고 불리는 시인들이 나타났다. 이들 중에는 의외로 기사 출신들이 많았고 전문적으로 시를 창작하는 유능한 시인도 많았다. 주로 고귀한 신분의 여성에 대한 기사의 사랑을 낭만적인 노래로 불렀다. 12세기 중엽 크게 유행하여 유럽 각지로 전파되었다. 독일에서는 민네징거라는 서정시인이 출현하였다. 트루바두르, 민네징거는 낭만적이고 생기 넘치는 시를 창작했으나 점차 정형화되고 생기를 잃어갔다.
프랑스 남부에서 서정시가 유행하고 있을 때, 그외 프랑스 중부, 북부에서는 다른 장르의 작품들이 등장했다. "무훈시"로 불리는 작품들은 기사들의 사랑이 아니라 그들의 용맹함과 주군에 대한 충성을 주제로 삼았다. <롤랑의 노래>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무훈시의 출현은 중세 봉건사회의 안정에 힘입은 바 컸다.
중세 귀족들은 여가시간을 보내기 위한 즐길거리가 필요했다. 북부 프랑스에서는 트루베르라고 불렸던 편력시인들이 이러한 수요에 호응하였다. 대표적인 트루베르는 크레티앙 드 트로아였다. 그는 이미 전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더욱 발전시켰다. 이후 아더왕의 전설은 성배 전설과 결합하였다. 독일의 민네징거 볼프람의 <파르치발>은 대표적인 성배 관련 서사시이다. 여기서 아더왕의 기사 파르치발이 성배를 보관하고 있는 그랄성과 성배를 발견한다. 고드프리드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또한 대표적인 기사문학 작품이다.
독일에서 기사문학의 일부 걸작이 나타났지만, 중세 속어문학을 주도한 것은 프랑스어였다. 귀족을 대상으로 했던 기사문학과 다른 성격을 가진 '우화'(fabliaux)가 발달한 곳도 프랑스였다. 우화는 이솝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귀족들도 즐겼으나 본래 도시민을 상대로 하는 웃음과 풍자가 섞인 단편적인 이야기였다.
이탈리아의 속어문학은 프랑스보다 더뎠다. 그러나 13세기 초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찬가>라는 걸작을 내놓았다. 13세기 말에는 중세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꼽히는 단테(1265~1321)가 나타났다. <서정시>로 출발하여 <향연>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탈리어아로 해설하였고, <제정론>에서는 독일황제 중심의 세계국가를 논하였다. 교황에 반대하다가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황제 체제를 지지하게 된 단테 자신의 처지가 반영되었다. <신곡>은 단테 최대의 걸작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고딕 교회건축과 함께 중세문화의 중심이 그리스도교였음을 잘 드러낸다.
보다 더 대중적이었던 것은 연극이었다. 장터에 임시로 세워진 간소한 무대에서 공연되었다. 13세기에는 종교, 도덕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속되고 희극적인 내용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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