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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문화 : 개설, 중세 교회, 수도원과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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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TI 2023. 5. 1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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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문화 : 개설

  유럽중세문화는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고대 로마제국에게 물려받은 로마적 요소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 역사무대에 등장한 게르만족의 게르만적 요소이다. 보편적 존재였던 중세교회에 의해 통합·규제되었다. 한편 중세교회는 봉건사회와 밀착되어 있기도 했다. 때문에 중세문화는 그리스도교적인 성격과 봉건적인 성격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중세 봉건사회는 지방분권적인 사회였다. 오늘날처럼 민족·국민 단위의 근대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중세교회가 국가를 초월한 보편적인 지배를 행할 수 있었다. 또한 중세문화에 보편성과 통일성을 부여하였다.
  중세 봉건사회는 신분제사회였다. 중세교회는 이를 신이 정한 질서라고 하여 옹호하였다.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노동하는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신분의 구분이 형성되었다. 중세 후반기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하면서 시민계급이라는 새로운 사회계층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눈에 띄게 성장하였으나 봉건사회의 신분제를 완전히 타파하지는 못하였다. 견고한 신분 구분과 상하 질서는 중세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각 신분은 각자의 상이한 생활과 문화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중세사회에서는 권위와 전통, 관습과 집단이 중시되었다. 때문에 중세문화는 개인의 능력, 창의성에 의한 창조보다 집단과 관습을 유지하고 권위와 전통이 지배하는 문화였다. 민족 대이동 이래 10세기 경까지의 유럽문화는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 면에서의 발전은 대체로 부진했다. 소위 '카롤링거 르네상스'도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는 잠시 반짝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11세기가 되면 그동안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밖으로 팽창할 힘을 갖추게 되었다. 중세의 문화도 이때 비로소 개화하기 시작하였다. 12~13세에는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에 힘입어 만발하게 되었다.

 

 

중세 교회

  중세교회는 초국가적인 강력한 조직체였다. 교황은 교회조직의 정점으로 교황청에는 교황을 보좌하는 많은 관리와 서기가 있었다. 교황 다음의 고위성직자는 추기경으로, 교황도 추기경회의에서 선출되었다<콘클라베>. 몇 개의 주교관구가 합쳐져 를 형성했고, 그 아래의 대주교(archbishop)는 대주교관구(province)의 관리자였다. 대주교관구는 몇 개의 주교관구를 묶어놓은 것이었다. 주교(Bishop)는 교회조직과 선교 등에서의 실무자이고, 주교관구를 관리한다. 각 주교관구의 중심도시에는 주교성당이 있고, 성당 참사회(chapter)가 주교를 선출·보좌하였다. 주교의 하부조직은 교구(parish)이다. 교구는 도시 또는 농촌을 묶어서 구성하였다. 도시는 보통 3~4개, 농촌은 촌락 또는 장원 1개가 하나의 교구를 구성하였다. 교구사제는 교구의 관리자로서 평신도(일반민중)과 가장 빈번하게 접촉하였다. 이러한 정규교회조직의 가장자리에 종교회의(공의회)와 수도원, 교단이 있었다.
  광대하고 체계적인 조직을 배경으로 교황은 강력한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교황에 복종하지 않는 군주나 제후를 파문으로 위협하거나, 한 국가 전체에 성사금지령(interdict)을 내리기도 하였다. 중세교회는 교회법(canon law)에 입각하여 독자적인 재판권을 갖고 있었다. 교회법 관련 처벌 대부분은 벌금형이었다. 처벌로 인한 벌금은 교회의 적지않은 수입원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교회의 수입원은 다양했다. 모든 신자들은 교회세(십일조)를 납부했고, 주교·수도원은 광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초입세(성직 취임 첫해의 수입을 교황에 바치는 것)나 신자들의 자발적인 기부 또한 큰 수입이 되었다. 13세기 교황청의 수입은 유럽 내 모든 국왕·제후의 수입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이렇듯 중세교회는 종교기관을 넘어 강력한 정치권력체이자 막대한 경제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중세의 정신세계와 문화는 교회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게다가 7성사를 통하여 사람들의 일상생활까지 관장하였다. 말 그대로 중세 유럽 사람들은 교회에 의해 태어나고, 교회에 의해 죽었다.

 

 

수도원과 교단

  중세 초기 교회는 유럽인들의 건전하고 경건한 정신과 생활을 조성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점차 규율이 흐트러지고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남용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교회를 다시 깨끗하게 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교회조직 외부에서 조직된 수도원과 교단이 그것이다.

  수도원은 베네딕토(480~550)가 500년경 로마 남쪽 몬테카시노에 세운 것이 시초이다. '베네딕토계율'을 정하고, 공동생활과 노동, 개인적 수양, 금욕주의를 강조하였다. 베네딕토계율은 이후 세워진 수도원에 많은 귀감이 되었고, 이 계율을 따를 것을 표방하는 수도원들을 통칭 베네딕토회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수도원들도 점차 세속화되었고, 폐단이 누적되던 중 프랑스에서 개혁의 움직임이 생겨났다.

  910년 아키텐 공(公) 기욤 1세가 세운 클뤼니 수도원은 중세 교회 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는 자신의 영지에 수도원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을 교황에 직속시킨다고 선포했다. 이전까지 영주들은 자기 영지에 있는 수도원에 간섭하려고 했다. 또한 상위 주교, 대주교의 간섭도 적지 않았다. 이는 교회와 수도원의 세습화를 가속하였다. 클뤼니 수도원은 세속 영주와 상위 성직자의 간섭을 배제하고 교황에 직속되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교황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교황의 영향력도 미치지 않아 비교적 자율적인 운영이 가능하였다. 이후 클뤼니 수도원을 시작으로 강력한 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베르노, 오도 등 뛰어난 수도원장을 필두로 순수하고 경건한 교회를 복구하여 하층농민뿐만 아니라 상층 계급의 지지도 얻었다. 그레고리오 7세(1073~1085. 성직매매·사제 결혼 금지. 카노사의 굴욕 등)처럼 클뤼니 수도원 출신으로 교황까지 올라 교회 개혁을 시도한 인물도 있었다. 

  이어서 12세기에는 베네딕트 계율을 엄수하려는 시토교단이 크게 성장하였다. 시토교단은 11세기 말에 창설되었다. 이후 클레르보 수도원장 베르나르(1190~1153)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2세기 초 교단 소속 수도원은 5개에 불과하였으나 베르나르의 노력에 힘입어 그가 죽을 무렵에는 340여개로 늘어났고, 13세기 말에는 두 배로 증가하였다. 

  시토교단은 베네딕트 계율을 엄격히 준수하여 단순하고 검소한 수도생활을 추구했다. 특징적인 것은 장원을 비롯한 농경지를 기증받는 것을 거부하고, 직접 황무지를 개간하여 교단의 수입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많은 황무지가 이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영국 요크셔(Yorkshire) 지역의 황무지가 거대한 목양지로 변하는 등 영국이 양모 생산의 중심지가 된 것도 시토교단이 주도한 개간사업의 결과였다.
  13세기에는 두 개의 탁발교단(Friar)이 조직되었다. 십자군 이후 교회의 위상이 추락하면서 생겨난 이단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쉽고 단순한 복음, 정화된 생활을 원하게 된 것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도시가 발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탁발교단 등장의 배경 중 하나이다.
  첫번째는 프란체스코교단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1182?~1226)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인가를 받아 설립한 "작은 형제회"가 시초이다. 청빈한 생활을 강조했고, 교육과 빈민구제, 해외선교에도 적극적이었다. 프란체스코 자신도 이집트에 갔었고, 뤼브뤼키가 루이 9세의 명으로 몽골에 다녀왔다.(1253~1255. 카라코룸 방문, 몽케 칸 알현. <동유기>) 또한 보나벤투라, 스코투스, 오캄 등 스콜라철학자를 다수 배출했다.

  프란체스코는 인간적인 매력이 풍부한 인물이었고,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생활을 추구하였다. 자연을 찬미하고 그 속에서 신의 영광과 업적을 보았다. 그는 설교를 통해 도시민에게 쉽고 단순한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이어서 여자를 위한 수도회인 클라라회, 속인을 위한 제3회도 조직하였다. 문학에도 뛰어나서 <태양의 찬가> 등 뛰어난 시를 남겼다. 많은 수도사들이 그를 존경하여 회색 모자가 달린 수도복 허리에 끈을 매고, 맨발에 샌들을 신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수도사 이미지인 것이다. 
  두번째는 도미니쿠스 교단이다. 성도미니쿠스(1170~1221)가 설립하였다. 에스파냐 출신으로,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던 중 이단 중 하나인 알비즈와파가 득세하는 것에 놀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선교를 시작하였다. 1216년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인가를 받아 교단을 설립하였다. 그의 주된 목적은 프란체스코와 달리 이단을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청빈을 강조하였으나 그것은 교단의 세력과 위상을 강화하는 방편이었다. 종교재판에도 적극 관여하였다.
  두 교단은 설립 이래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외형적 성장뿐마 아니라 13~14세기 대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초기의 청빈, 검소함과 거리가 멀어지고, 15세기에는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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