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문화와 학문을 지배하던 중세에서 자연과학이나 기술이 발달할 여지는 크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와 아랍의 과학지식이 전해졌으나 그것을 능가하기 위한 노력은 거의 없었다. 드물게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는 점성술과 연금술의 발달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연금술은 14~15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저질의 금속을 황금으로 변화시킨다는 소위 '철학자의 돌'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화학 실험기구를 발명했고 새로운 증류법을 발견하는 정도의 성과가 있었다.
주목할만한 성과는 영국에서 나왔다. 그로세테스트(1168~1253)는 옥스퍼드대학 총장을 거쳐 링컨의 주교가 되었다. 직접적인 관찰과 지식을 강조했고, 자연에 대한 수학적인 설명을 시도했다. 즉,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시도한 것이다.
로저 베이컨(1220~1292)는 그로세테스트의 제자이자 프란체스코파의 탁발수도사였다. 그는 고대의 권위에 대한 지나친 존중이 지식의 진보를 막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자연현상 연구에 있어서 실험과 관찰을 강조하였다.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비행기, 잠수함 등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으나 자기 나름의 실험이나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지는 않았다.
1100년경부터 중세봉건사회는 안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혼란과 무질서한 상태를 벗어나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법에 대한 관심도 다시 살아났다. 로마법은 '주권' 개념과 함께 입법권을 가진 공공권력체라는 국가 및 정부의 개념을 주입시켰다. 여기에 중세 이탈리아에 전해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은 단 1부였는데, 그 사본이 발견되어 로마법 연구가 더욱 활발해졌다. 볼로냐의 이레니우스는 로마법을 전체적인 체계로 파악하고 설명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고, 볼로냐 대학은 중세유럽에서 법학연구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 마찬가지로 볼로냐의 수도사 그라티아누스(?~1158)는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을 편찬하여 교회재판에서 기준으로 삼을 종교회의 내용, 교황의 훈령 등 다양한 자료를 정리하였다. 이 법령집은 교회법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참고서가 되었다.
교회법은 교황이 관장하고 성직자와 교회에 관한 모든 문제를 취급했다. 그러나 성직자가 아닌 일반 속인 또한 교회의 신자였기 때문에 세속 생활의 많은 부분을 다루기도 했다. 예를 들어 결혼, 지참금, 유언, 계약 및 서약, 빈민구제, 이단, 이자 등에 관한 문제까지 교회법에서 규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교회법이 체계적으로 정리됨으로써 세속, 현실에서 교회법의 위상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 법령집에 규정된 교황의 권한을 이용하여 교황은 새로운 입법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또한 교황법정(papal curia)는 유럽에서 최고법정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중세시대 역사 서술은 상당히 빈약했다. 인간보다 신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역사서 대부분은 단순히 소재를 나열하고 정리하는 수준에 그쳤다. 다만 중세 전반기 그레고리의 <프랑크사>, 비드의 <영국교회사>, 아인하르트의 <찰스대제전>등이 주목할만하다. 중세 후반기 들어 윌리엄(?~1143)은 <영국왕의 역사>를 저술하였다.
12세기 말경부터 역사 서술에 라틴어 대신 국어가 사용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죠프레이(조프르와)의 <제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플 정복>, 즈왱빌의 장이 저술한 <성왕 루이전> 등이 프랑스어로 서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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