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지적 호기심에서 피어난 탐구정신은 문물의 개량과 발명으로 이어졌고 훗날 근대과학의 기초가 되었다. 이미 있었던 것을 개량하여 실용성있게 만들거나 완전히 새로운 발명이 이루어져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들이 나타났다. 화약, 나침반, 활판인쇄술이 그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이 세 가지를 세상을 바꾼 3대 발명품으로 꼽기도 했다.
화약은 일찍이 중국에서 발명되어 이슬람 세계를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불로장생의 단약을 만들려다가 우연히 발명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8세기 이후부터 군사 목적으로 사용되었고, 송나라 때에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화물요자작"이라는 국영작업장이 수도 변경에 있었고, 병법서 <무경총요>에서 화약무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13세기 몽골이 유럽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화약도 전해졌다. 1320년대 독일에서 처음으로 화포가 개발되었으나 성능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저 베이컨은 화약무기를 경계하는 말을 남겼다.
"군중들은 과학적 사실을 소화해낼 능력이 없다.
분명 그것(화약)은 오남용될 것이고, 자신들과 현자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힐 것이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지 않아야 한다."
얼마 뒤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에서 화포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1346년 벌어진 크레시 전투는 장궁병의 활약으로 영국이 크게 승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만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영국이 운용했던 화포 5문이 만들어낸 폭음과 진동으로 인해 프랑스군에 혼란이 야기된 것 또한 사실이다. 직접적인 피해는 미미했지만 실전에서 화포의 위력과 효용을 실감하게 된 사건이었다. 이후 프랑스에서도 화포를 연구, 개발하기 시작했다.
화포가 가장 충격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장소는 아마 콘스탄티노플일 것이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거대하고 견고한 성벽을 쌓아 오스만투르크를 방어하고 있었다. 헝가리 출신 기술자 오르반은 비잔틴 황제에게 화포 개발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고 오스만의 메흐메트 2세에 접근해 거대한 화포 "바실리카"를 제작했다. 바실리카는 길이가 8.25미터나 되었으며 450kg의 석공을 발사할 수 있었다. 1453년 메흐메트 2세는 50일만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도시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꿔버렸다.
이후 유럽에서는 더욱 활발하게 화약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15세기 말이 되면 화약무기가 다수 보급되면서 전쟁의 양상도 변화하였다. 봉건영주의 견고한 성채가 무의미해지면서 방어전보다 공격 위주 전술이 활용되었다. 또한 봉건기사의 전략적 가치가 사라졌고, 그에 따라 기사의 사회적 지위도 하락하였다.
나침반 또한 중국에서 발명되어 아랍인 선원에 의해 유럽에 전파되었다. 12세기 말 나침반(방향을 가리키는 자석)을 언급한 시 작품이 나타나지만 14세기가 되어야 나침반과 함께 활용할 수 있는 해도가 제작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유럽에서는 원양항해가 가능해졌고, 활동의 주무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 인도양으로 옮겨졌다.
구텐베르크(1400~1468)가 최초로 활판인쇄술 발명자인지에 대해 반박 의견도 많지만, 어쨌든 1440년대 독일에서 활자가 발명된 것에는 이견이 거의 없다. 이후 활판인쇄술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1500년경 이탈리아에만 활자를 이용한 인쇄소가 70여 개 이상 영업을 하였다. 인쇄술의 발명과 보급으로 인해 비싸고 오래 걸리는 필사본보다 훨씬 정확한 인쇄물이 싸고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정보와 지식이 신속하게 보급,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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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16세기 "스파뇰라 기도서" 필사본과 (우)"구텐베르크 42행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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