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들어 비잔틴제국은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투르크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해 함락된 후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흩어졌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로 넘어간 비잔틴 학자들로 인해 그리스 연구가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플레톤(Gemistos Plethon. 1355~1452)은 <법률>(nomoi)에서 플라톤 사상에 입각한 범신론적 종교론을 제시하여 피렌체에서 플라톤철학이 부활하는 데이 기여했다.또한 그는 피치노와 함께 코시모 메디치의 후원을 받아 플라톤 아카데미를 창설했다. 15세기 말경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는 플라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출간했다.
라틴고전에 관한 연구 또한 페트라르카의 뒤를 이어 계속 수행되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라틴고전 연구는 자기 조상들의 역사와 생활, 문화를 알고자 하는 열의와 결합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라틴작가를 모방하고 작품에 대한 주석 중심의 연구였다. 이후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7~1457)에 의한 문헌고증 및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로렌초 발라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서유럽 지역을 교회령으로 기부했다는 <콘스탄티누스 기부장(기진장)>이 9세기경 위조된 것을 밝혀냈다.
이처럼 고전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대의 유물 특히 문서 사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이를 수집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인문주의자들은 서로 다투어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 있는 수도원이나 교회 도서관을 뒤지고 고사본을 수집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로마의 고전작품 대부분은 16세기 초에 이미 수집·정리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인문주의의 전파 및 보급의 가장 일반적인 수단은 저명한 학자의 공개강의였다. 페트라르카 사후에도 이러한 강의들은 활발히 이뤄졌다. 또다른 방법은 학회 형식으로, 후원자와 학자들의 사적 모임 성격이 강하였다. 참여자나 다루는 내용의 범위는 한정적이었지만 그 수준과 성과는 전문적이었다. 저명한 학자들의 공개강의는 15세기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도시, 문화중심지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수강생들이 모여들었고, 이를 통해 고대 그리스적인 인간상과 교육이념을 다시 희구하게 되었다.
펠트레(Vittorino da Feltre. 1378~1446)는 만투아 후작의 지원으로 학교를 개설하였다. 유쾌한 집(La Coicosa)으로도 불렸던 그의 학교는 다른 귀족의 자제도 받아들였고, 가난한 집 자제로 구성된 클래스도 만들었다. 그의 교육목적은 학생의 전인격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즉 지적·윤리적·육체적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교양뿐만 아니라 승마·레슬링·펜싱·수영 등 체육활동의 비중이 높았다고 알려져있다. 펠트레는 이러한 전인교육을 통해 특정 직업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시민, 유능한 사회의 일원을 육성하고자 했다.
인문주의의 보급을 바탕으로 학회활동도 활발해졌다. 인문주의자와 그 후원자를 중심으로 한 학회가 이탈리아 곳곳에 설립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피렌체의 플라톤학회였다. 이 학회는 15세기 후반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으로 설립되었고, 그의 후계자 로렌초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피치노, 미란돌라, 알베르티 등 당시 플라톤 연구의 대가들과 더불어 미켈란젤로도 참석하고 있었다. 회원 대부분은 대학의 중세적 스타일에 비판적이었고, 라틴어 실력을 매우 중시했다. 플라톤학회에서는 철학적 논의 외에도 명상·사색 중심의 생활과 현실적인 활동 사이의 우열에 관한 논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란티노의 <카말돌리 논쟁>에서는 이러한 플라톤학회의 활동과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구텐베르크(1397~1468)의 활판인쇄술 또한 인문주의 보급에 크게 공헌하였다. 지식을 신속하게 보급할 수 있게 되면서 학문과 문화는 협소한 성직자 집단을 넘어서 보다 넓은 사회계층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는 15세기 중엽 인쇄술이 전파되었고, 15세기 말이 되면 베네치아, 안트베르펜, 파리, 리옹, 제네바 등 유럽 주요 도시에서 근대적인 출판업자가 등장하였다.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