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의 난(755~763)은 당나라 중기에 일어나 국가의 안정을 위협하는 큰 사건 중 하나였다. 안록산과 사사명이 함께 일으켰기 때문에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안사의 난이라고 한다. 이 글에서는 반란의 원인과 경과, 영향과 더불어 역사적 맥락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당나라(618~907)는 중국 역사상 가장 번영하고 국제적인 시기 중 하나였다. 특히 무역, 예술, 문화가 번영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정, 사회·경제적 불평등, 외부의 군사적 위협이 공존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영농 및 소농민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당 초기부터 시행된 균전제, 부병제, 조용조 등의 제도들은 소규모 자영농 계층을 육성하고 보호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와 규제가 점차 이완되어 귀족, 부유층의 토지 겸병이 심해졌다. 토지에서 쫓겨나 유민화된 농민들이 늘어났다.
둘째, 중앙 정치가 혼란스러워졌다. 귀족가문들이 기득권을 장악한 가운데, 중앙 정계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 "능문능리"라고 불렸던 이들은 부유한 지주, 상인 출신으로 학문적, 실무적 역량이 뛰어났다. 이들은 꾸준히 관직에 진출하고 세를 불려나갔다. 당 중기에 이르러 정계는 문벌귀족과 능문능리의 다툼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문벌귀족 출신 재상 이임보는 재산 축적에 몰두한 나머지 변방 방어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746년에는 뛰어난 과거 출신 관료가 나타날 것을 두려워하여 과거 응시자를 전원탈락시키는 사건을 빚기도 했다.
셋째, 변방 절도사가 비대해졌다. 안정적인 농민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징병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변경 방어는 이민족 절도사를 임명하는 식으로 처리되었다. 이들 이민족 출신 변방 절도사는 용병을 고용하여 군사력을 유지했다. 용병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영지 내에서 무거운 세금을 거두었고 이는 농민들에게 전가되었다. 절도사는 거의 독립적인 지위에 가까운 재량권이 있었고, 부하들과 의형제를 맺는 식의 사적 관계로 조직을 유지했다. 이러한 사적 관계는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처우가 부족하면 곧바로 하극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안록산은 이란계 소그드인 아버지와 돌궐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잡호'라 하여 지방관리들에게 천대받았다. 그러나 안록산은 6개 언어를 구사할 정도로 재능이 출중하여 이를 바탕으로 영주(營州: 현 북경의 북동쪽 지역)에서 호시아랑(互市牙朗: 무역중개인)을 했다. 742년에는 영주를 본거지로 하는 평로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군사적으로도 재능이 뛰어났고 처세술에 능하여 현종과 양귀비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오직 폐하를 향한 충성으로 가득합니다!"
- 비만으로 불룩한 안록산의 배를 보고
현종이 농담삼아 무엇이 들었는지 묻자 안록산의 대답
안록산은 범양절도사(744년), 하동절도사(751년)까지 겸하게 되었다. 당시 당나라 국경방어군의 30%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볼 수 없었던 황태자와 양국충(양귀비의 친척)은 안록산에 모반 혐의를 씌워버렸다. 안록산도 가만히 있지 않고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일으켜 남하했다.
사사명은 안록산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 안록산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행동을 함께 했다.
양국충의 고변으로 현종은 안록산을 소환했다. 소환에 응하여 장안에 가면 죽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안록산은 거병하기로 결정했다. 안록산이 동원한 병력은 이민족 정예 8,000명과 한족 병사 20만명이었다. 거병한지 불과 한 달 만에 낙양을 점령했다.(755년 12월) 안진경, 곽자의 등이 이끄는 토벌군이 반란군 일부를 격퇴했지만 결국 반란군은 수도 장안까지 진격했다. 현종은 사천으로 피난길에 오르는데, 도중에 주변 병사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양국충을 처형했고, 양귀비에게는 자살을 명했다.
756년, 서북쪽으로 피신한 황태자 이형은 두홍점 등에게 추대되어 감숙성에서 제위에 올랐다. 그가 곧 숙종이다. 하지만 숙종은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기 전인 762년에 사망하고, 현종이 다시 통치하게 되었다.
757년 2월, 안록산은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등창이 심했고, 시력도 잃었다. 성격마저 포악해졌다. 결국 아들 안경서가 아버지를 죽이자, 사사명은 당에 귀순해버렸다.
758년, 숙종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다른 이민족인 위구르족을 끌어들였다. 회흘(回紇)로 표기되는데, 당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장안에 이어 낙양까지 탈환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숙종은 귀순한 사사명을 제거하려고 했다.
759년, 사사명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안경서를 죽였고, 낙양을 점령했다.
761년, 사사명은 본처 소생 막내아들인 사뢰청을 편애하고, 첩 소생인 사조의를 죽이려 했다. 이에 사조의가 반기를 들어 사사명을 살해하고 반란군을 장악했다. 그러나 끝내 부하들의 충성을 얻어내지 못했다.
763년, 사조의는 당나라의 토벌군과 범양절도사 이회선, 위구르 연합군에 패하였다. 이로써 9년에 걸친 대규모 반란이 진압되었다.
안사의 난을 기준으로 당나라의 역사를 전기·후기로 나눌 정도로 그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다음 몇가지 사항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전쟁터가 되었던 화북 지역은 철저히 파괴되고 황폐화되었다. 농토 대부분은 사라졌고, 인구 또한 전쟁통에 죽거나 장강 이남으로 대거 피난하여 크게 줄어들었다. 다만 강남 지역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강남의 경제력이 화북을 앞서기 시작했다.
난 이후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난을 진압하기 위해 여타 절도사들의 재량권을 보장해준 결과 절도사들은 사실상 독립적인 '번진'으로 변했다. 이러한 번진들이 중국 전역에 난립했고, 특히 화북 지역은 당 조정의 말이 거의 통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강남 지역은 비교적 당에 순응하는 소위 '순지'가 많았다.
재정이 악화되자 이를 극복할 방안을 모색했다. 780년, 덕종은 양염의 건의에 따라 세금제도를 개혁했다. 이를 "양세법"이라고 한다. 보리 수확기인 6월, 쌀 수확기인 11월, 연 2회 납세하며, 요역을 폐지하는 대신 금전으로 납부하게 했다. 또한 출신지를 따지지 않고 현거주지를 인정해주었고 자산에 따라 과세했다.
재정은 크게 회복되었지만 이제 당은 정치, 외교, 국방 등 다방면에 걸친 문제들을 자체 역량이 아닌 재정으로 해결을 시도하는 재정국가가 되었습니다.
안사의 난은 당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이는 당 후기의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했다. 반란은 결국 실패했지만, 그것은 중국 전역, 그 중에서도 전통적으로 중국의 중심이었던 화북 지역과 백성들에게 중대한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안사의 난을 이해하는 것은 중국 역사상 중요한 왕조 중 하나인 당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큰 기준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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